삼척 이승휴 유허지에서 마주한 고요한 사색의 흔적
늦은 가을 오후, 삼척 미로면의 천은사 터에 세워진 ‘이승휴 유허지’를 찾았습니다. 고요한 산중에 자리한 이곳은 ‘제왕운기’를 지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 이승휴 선생이 은거하던 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심에서 벗어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자 숲 사이로 작은 평지가 드러났고, 그 한가운데에 유허비와 정갈한 비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낙엽이 바닥을 덮고 있었고, 가을 햇살이 비각의 붉은 기둥을 따라 부드럽게 내려앉았습니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공간에는 묘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역사적 인물의 숨결이 깃든 자리라 그런지, 단순한 유적지 이상의 무게감이 전해졌습니다.
1. 미로면 깊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천은사 터로 향하는 길은 미로면 중심에서 차량으로 약 15분 거리입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중간에 천은계곡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이승휴 유허지’라는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흙길로 이어지며, 산책로처럼 완만하게 경사가 이어집니다. 입구에는 작은 주차 공간이 있고, 걸어서 5분 정도 오르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 비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낮은 소리를 냈고,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땅바닥에 점처럼 떨어졌습니다. 계곡물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2. 고요한 터에 남은 건축의 흔적
현재 천은사는 사찰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석축과 초석 일부가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위쪽으로는 이승휴 선생의 유허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기와지붕 아래에 둘러친 목재 난간이 단정하며, 붉은 기둥과 회색 지붕이 숲의 색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비각 안에는 ‘고려 문신 이승휴 선생 유허비’라 새겨진 비석이 자리하고 있고, 글씨는 오래되었지만 획의 기운이 살아 있습니다. 주변에는 돌담 일부가 남아 사찰이 있었던 당시의 범위를 짐작하게 합니다. 발 아래 돌계단은 낡았지만 발자국이 닳아 자연스러운 광택이 생겨 있었습니다. 사라진 사찰의 자리 위로, 오직 시간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3. 이승휴 선생과 천은사의 인연
이승휴 선생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 천은사에서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역사를 신화와 함께 정리한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허지에는 선생이 머물던 방의 위치와 글을 집필하던 자리를 표시한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설명문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역사와 도리를 함께 생각했던 공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실제로 이곳의 풍경이 그 문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산의 품 안에 둘러싸인 이 조용한 터는 학문과 사색에 몰두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와 낙엽의 부스럭거림마저 그 시절의 숨결처럼 들렸습니다.
4. 섬세하게 유지된 유허지의 환경
유허지 주변은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비각 앞에는 낮은 돌계단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 잔디는 고르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비석의 글씨가 훼손되지 않도록 투명 보호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비각 천장 안쪽에는 통풍 구멍이 나 있어 습기를 줄이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각 지붕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마저 고요한 공간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돌담 아래에는 작은 들꽃이 남아 계절의 끝을 알리고 있었고, 누군가가 조심스레 놓고 간 흰 국화 한 송이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습니다. 이 모든 풍경이 자연스럽고 담백했습니다.
5. 인근의 볼거리와 추천 동선
유허지를 관람한 뒤에는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있는 ‘미로정원마을’을 함께 방문했습니다. 사계절 꽃길이 조성되어 있어 산길의 고요함과는 다른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근 ‘천은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도 유명한 곳으로, 계곡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완만해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좋습니다. 천은사 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미로한우촌’ 같은 지역 맛집이 있어 따뜻한 점심을 즐기기에도 알맞았습니다. 봄철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유허지와 계곡을 둘러싸며 완전히 다른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자연과 문화유산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하루 코스로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6. 방문 시 참고할 점
이승휴 유허지는 입장료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으며, 접근로가 짧지만 흙길이라 비 온 뒤에는 미끄러울 수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벌레가 많으니 긴 옷차림이 좋고, 여름에는 모자와 물을 챙기면 편합니다. 안내판의 글씨가 햇빛에 바래 있어 천천히 읽으면 이해가 더 잘 됩니다. 조용한 분위기의 장소이므로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음식물을 반입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합니다. 오전 10시 이전이나 해질 무렵 방문하면 햇빛이 비각에 비스듬히 들어와 사진이 가장 아름답게 나옵니다. 긴 시간 머물기보다는 잠시 앉아 주변의 정적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무리
삼척천은사의이승휴유허지는 역사의 한 인물이 자연 속에서 사유하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공간이었습니다. 사찰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바위와 바람, 그리고 비각 하나만으로도 당시의 정신이 살아 있었습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이곳에 서 있으니, 말없이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선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다음에는 초여름의 푸른 숲이 가득한 시기에 다시 찾아, 다른 계절의 유허지를 보고 싶습니다. 조용히 서 있기만 해도 생각이 맑아지는 곳, 그 자체로 하나의 책장을 넘기는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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